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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1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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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기억 속의 설악1번지> ‘그곳’에서 ‘그때’를 만나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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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동 소공원 (속초시 설악동 170번지. 현 ‘설악산로 1137’ 일대.)
단풍, 설악의 빵 혹은 꿈
1. 무명에서 한국 최고 명산으로
1996년 정부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겠다는 목표 아래 ‘한국의 10대 문화상징’을 선정해 발표한다. 한복, 한글, 김치와 불고기, 불국사와 석굴암, 태권도, 고려인삼과 탈춤, 종묘제례악, 설악산, 그리고 세계적인 예술가 몇 명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우리의 설악산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브랜드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설악산이 그 중 으뜸으로 꼽힌 셈이니,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설악산이 이제야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일치’되었다며 환호했다.
사실 설악산이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우리 시대 들어와서이다. 지난날 설악산은 그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금강산이 조선왕조실록에 164회나 기록될 동안, 설악산은 고작 8번밖에 등장하지 못한다. 정감록 따위의 비서(秘書)들이 계룡산이나 태백산을 십승지(十勝地)로 꼽을 때, 설악은 그 존재가 전혀 거론되지 못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설악산은 그저 금강산의 명성에 얹혀 지내왔을 뿐이다. 사람들은 설악산을 단지 금강산의 한 봉우리쯤으로 여겼다. 설악산에 있는 사찰도 ‘금강산 신흥사’로 소개되었고, 설악산의 명물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미처 당도하지 못한 바위”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금강산은 통일신라시대부터 화랑들이 수련 차 몰려올 만큼, 유구한 세월 그 명성을 자랑해왔다. 조선시대엔 금강산을 여행하는 것이 선비들의 최대 숙원이었고, 일제강점시절엔 그 전쟁 와중에도 일본인들이 금강산 유람을 위해 별도로 철로를 개설할 정도였다. 그러니 금강산과 근접해 있는 설악산은 좀체 빛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6.25 전쟁으로 설악산은 수복되었지만 금강산은 끝내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이때부터 설악산은 그 ‘대용품’으로 개발된다. 실제로 1950년대말 설악산 개발에 참여했던 최구현 이달영 등은 금강산에서 산악안내와 더불어 직업사진사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휴전이후 속초에 정착한 그들은 설악산이 금강산과 ‘매우 유사한 풍광’을 지녔음을 간파하고 ‘설악산을 제2의 금강산’으로 만들 결심을 한다. 이들은 지뢰밭을 헤치며 설악산을 누벼 등산로를 개설하고, 곳곳에다 금강산 지명을 그대로 따 붙인다. 귀면암이니 만물상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금강산 지명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들은 속초시내 상인들을 이끌고 지금의 ‘설악동 소공원’ 내에 집단 이주해 상가를 형성한다. 그리고는 정부 요로를 방문하고 외국 대사관을 순회하는 등 설악산 알리기에 혼신의 정열을 바친다. 이렇게 해서 그때까지 무명이었던 설악산은 1960년대부터 관광명소로 알려지게 되고 70년대 접어들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제일의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된다. 그 이래 설악산은 한국 최고의 명산으로 군림했고, 이윽고 한국의 모든 산을 대표하여 ‘문화 상징’의 명예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2. 속초사람들 먹여 살린 산업기반
196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진실로 설악산의 전성시대였다. 당시의 설악동 170번지는 ‘설악특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때의 교통편 사정으론 상당히 번잡한 과정과 오랜 시간이 소요됨에도, 탐방객들은 이곳을 멀다 불평하지 않았다. 정규 직행버스나 고속버스 외에도, 피서철이나 단풍철엔 서울과 설악산을 오가는 임시 버스들이 늘 대기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관광버스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관광객들을 주야로 실어 날랐다. 여관방은 늘 모자랐고, 식당은 항상 붐볐으며, 등산로는 언제나 혼잡스러웠다. 한 해 350만에 이르는 탐방객들이 들이닥치곤 했으니 당시의 생활수준과 관광여건을 고려해 볼 때 대단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 때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왔었다. 경주나 부여 같은 역사 유적지를 빼곤 단연 설악산이 으뜸 여행지로 꼽혔다. 그 시절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신혼부부들이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갈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한 설악산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여행지였다. 그 무렵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중산층이 설악산을 연례적으로 방문했다. 피서철이나 관광철에 설악산을 다녀갔느냐 여부가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저들이 이곳을 최고의 명승지로 인식하게 되면서, 설악산은 속초사람들을 먹여 살린 산업기반이 되었다. 어마이들은 설악동 여관에 고용되어, 쪽방에 단체로 기거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학여행단에 밥을 해주거나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했다. 집에는 1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들릴 뿐이니, 자녀들을 돌볼 틈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오빠나 할머니들은, 떠돌이 행상이 되어 ‘아이스케키’나 ‘에델바이스’ 따위를 관광객들에게 팔아 생계를 도왔다. 아바이들은, 비선대나 흔들바위 상가에다 그 무거운 ‘사이다’ 상자를 져 날라다주며 어한기 생활비를 보충했다. 청년들은 설악동 진입로 토목공사나 상가 건설공사장에서, 처녀들은 여관의 안내원이나 전화교환원으로 그 찬란한 젊음을 보냈다. 그 탓에 단풍철만 되면 속초시내 빈민촌 산중턱에서 ‘어른’들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이렇듯 속초의 아들딸들은, 그가 뱃놈의 자식이건 장사치의 자식이건 간에, 저마다 ‘홀로’ 커야 했다.
3. 재개발 추진 ‘설악동 소공원’으로
속초사람들에게 있어 설악산은 긴박한 생활터전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자산 가치를 지니려면 자연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설악산은 그 태동부터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설악동 관광지가 빠르게 성장하자, 이에 고무된 속초시는 설악동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신흥사 부근에 스키장 건설이 추진되기도 했고, 양폭산장 신축을 비롯해, 울산바위에 철제다리, 비선폭포 길목에 구름다리를 설치하는 등 더 많은 시설물들을 들이게 된다. 하지만 문화재보호위원회와 국제자연보전협회에서는 이 이상의 훼손은 용납할 수 없다며 저지하고 나선다. ‘문화유산 설악산’을 유흥장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설악동 170번지 마을을 당장 산 밖으로 이전시키고, 몇몇 탐방로는 즉각 폐쇄하라고 요구한다.
뜻밖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 주장에 적극 호응한다. 대통령은 해마다 설악동 한 호텔에서 가족들과 휴양을 하며 단풍을 즐겼는데, 아닌 게 아니라 설악산이 지나치게 훼손되고 있는 것 같더라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에 설악산 재개발은 급물결을 타게 된다.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도 소용없었다.
업자들은, 강원도로부터 합법적인 절차와 승인을 거쳐 시설된 건물들을 철거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력히 반발했고, 市에서도 철거시기가 재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며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박경원 도지사는 관광산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관광자원의 보존이 시급한 만큼, 자연보호 정책은 철회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박 지사는 지난 10월에 朴대통령이 설악산을 다녀가며 자연훼손에 대한 지적이 준엄했음을 상기시켰다. (67.11. 강원일보)
이후,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설악동 불법시설물 단속이 실시되고, 설악동 재개발 계획이 추진되었다. 1973년엔 설악산 국립공원 개발 기본계획이, 75년엔 설악산 집단시설지구 정비사업 계획이 확정되고, 이윽고 1978년 현재의 신단지로 입주하게 된다. 설악동 170번지는 이때 케이블카를 제외한 모든 시설물이 철거되고 ‘설악동 소공원’으로 거듭난다. 주민들은 그곳을 ‘설악동 구단지’라고 불렀다.
4. 가을 단풍 시발점, 겨울 결빙 표본
생각해보면 설악산 깊은 곳에 인공 시설물을 들인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긴 했다. 아마도 지금 같으면 도문동에 숙박시설과 위락시설, 주차장 등을 집중 설치하고, 설악산 주요 탐방로는 친환경적 방식으로 접근시키는 정책을 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가능한 한 산 속 깊숙이 근접하여 시설물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차량이 일반화되기 전이니 오직 도보로 이동하던 때인데, 산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숙박시설을 들인다면 탐방객들의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존 신흥사와 근접한 공터를 개발해 정착했던 것이나, 그럼으로써 오히려 설악산의 절경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뒤늦은 깨달음으로 황급히 그곳을 비운 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설악동 관광단지는 A, B, C로 분류되는 신단지로 이전했다. 그러고도 상당 기간 설악동의 전성시대는 지속되었다. 설악산 단풍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단풍을 즐기려는 인파도 꾸준히 붐볐다. 외국 사절이 한국을 방문하면 반드시 설악산 단풍을 구경시켰기에, 88올림픽 때엔 IOC위원들도 필수코스인 양 이곳을 다녀갔다.
설악산 단풍은 대청봉에서 소공원까지 내려오는 데 한 달이 걸리므로 하루 50m씩 하강하는 셈이다. 전국으로 보면 설악산을 기점으로 하루에 15~20㎞씩 남하한다. 초속 20㎝ 정도의 속도로 내려가 제주도에 첫 단풍이 들 때엔 설악산 단풍이 절정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설악산은 한반도 모든 산악의 기준점이니, 가을이면 단풍의 시발점이요, 겨울이면 결빙이나 강설의 표본이 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 관광 양태의 풍향을 가늠하는 기준자이기도 했다.
5. 관광패턴 다양화 속 명성 잃어
하지만 설악산의 전성시대는 매우 짧았다. 관광패턴이 다양화되면서 설악산이 그 명성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더욱이 90년대부터 미시령과 학사평 일대에 콘도미니엄이 대거 들어서면서 설악동 숙박단지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신혼여행지로서 설악산은 이미 매력을 잃었고, 수학여행단마저 콘도들에 빼앗기게 되자, 설악동은 찬바람만 부는 황량한 산자락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문화브랜드라는 지위도 박탈당한다. 설악산이 절경이라고 하나 중국의 장가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비판에 직면한 정부는, 2005년 설악산이 문화상징으로서의 대표성과 매력이 떨어져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다. 애당초 금강산의 명성에 기대어 부흥을 꾀했던 설악산은, 이렇듯 국민들의 시각이 국제화되고 그 안목이 확대됨에 따라, 단지 ‘남한에서만 으뜸’일 뿐이라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 수원 화성, 고창화순 고인돌유적 등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브랜드’에 새롭게 포함되고, 우리의 설악산은 ‘우물 안 개구리’로 취급되며 그 지위를 잃고 말았다.
6. 세계 단풍1번지, 설악산 부활 확신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설악산 단풍은 단연 전 세계 으뜸이다. 발악하듯 외치건대, 인류가 생물학적 본성을 잃지 않는 한 기어코 설악의 단풍은 그 미적가치를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설악산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빌 것이고, 설악산 단풍에 대한 경의와 찬탄도 여전히 이어질 것이며, 설악산을 지켜온 우리의 자부심도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시대 설악의 단풍은 우리의 빵이었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설악의 단풍은 우리의 꿈으로 존재할 것이다. 설악산의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는, 그래서 ‘설악동 170번지’를 세계의 단풍1번지라 부른다.
기사출처 설악신문 최재도 / 극작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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